[인터뷰] 시간의 결을 그리다, 태인

Apr 1, 2026

[인터뷰] 시간의 결을 그리다, 태인

태인의 화면에는 도자기가 놓여 있다. 둥글고 단정한 형태, 매끄러운 표면, 빛을 머금은 여백. 처음에는 조용한 정물처럼 보이지만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그 안에 다른 시간이 겹쳐 있음을 느끼게 된다. 유약이 흘러내린 자리와 미세한 균열, 오래된 표면에 남은 흔적들은 사물의 질감을 넘어 누군가의 삶과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에게 도자기는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오래 바라봐 온 시간에 가깝다.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에서 바라보아 온 풍경이자 부모의 삶과 자신의 뿌리를 이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극사실 회화는 재현에 머물기보다 사물에 쌓인 시간을 차분히 드러내는 방식에 가깝다.

태인
태인 작가 Photo by ARTN Edition

Q.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미술을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A. 도자기 마을에서 도예를 하시던 부모님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흙과 가마, 도자기를 가까이에서 보고 만지며 자라다 보니 형태를 바라보고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시간이 쌓이며 지금의 작업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Q. 도예 대신 회화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직접 흙을 다루는 일보다 완성된 도자기를 바라보고 기록하는 방식에 더 끌렸습니다. 입체로 존재하는 도자기가 평면의 그림으로 옮겨지는 과정 자체가 또 하나의 시간의 흐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들여다보고 풀어내는 작업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Q. 극사실적인 표현 방식을 지속해 온 배경도 궁금합니다. A. 도자기는 멀리서 보면 단순한 형태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유약의 흐름이나 표면의 두께, 미묘한 색의 변화처럼 오랜 시간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요소들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섬세한 방식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그 과정이 저의 성향과도 잘 맞았습니다. 저에게 극사실 묘사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도자기가 가진 분위기와 시간성을 깊이 바라보기 위한 방법에 가깝습니다.

Q. 다양한 사물을 그리던 시기에서 도자기로 집중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A. 처음에는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관심이 점차 제 안쪽으로 이동했고 가장 깊은 부분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이후 익숙했던 도자기들이 전혀 다른 감정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에서 보아온 대상이기에 작업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Q. 최근에는 청자보다 백자를 주요 소재로 다루고 계십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A. 백자는 장식이 많지 않은 만큼 형태와 여백이 지닌 힘을 또렷하게 드러내는 대상이라고 봅니다. 저는 그 하얀 표면을 하나의 도화지처럼 바라보고 있습니다. 청화 안료를 물감처럼 사용해 백자 위에 풍경을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산책을 하며 자연 속에서 느꼈던 위안과 감정들을 화면 안에 함께 옮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 작업 속 도자기는 단순한 정물이 아니라 풍경과 기억이 머무는 존재입니다.

Q. 작업할 도자기를 선택하는 기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A. 특별히 정해둔 기준이 있다기보다는 처음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분위기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형태의 균형이나 도자기가 가진 고요한 정서, 오래된 것에서 오는 시간성 같은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선택의 기준이 됩니다.

Q. 작업을 이어오면서 색에 대한 고민도 함께 깊어졌을 것 같습니다. A. 색이 가진 상징적인 의미보다는 도자기와 색이 만들어내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화면의 공간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도 따뜻한 느낌의 블루를 찾아 화면을 구성해 보고 싶습니다.

태인 작가 작업 사진
태인 작가 작업 사진

Q. 대표 시리즈 ‘Ceramic Story’라는 제목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A. 도자기는 부모님이 평생을 바쳐 만들어 온 삶의 산물이자 동시에 제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단순한 사물을 기록하기보다 인생의 시간을 바라본다는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흙에서 시작된 도자기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듯 인간 역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 또한 그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으로 돌아가셨고, 그 경험이 제 작업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Ceramic Story’는 도자기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저와 부모님, 그리고 시간과 기억을 따라가는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Q.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요. A. 작년 추석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작품의 흐름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조금 더 고요하고 울림이 깊은 화면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자기의 형태뿐 아니라 흙이 지닌 물성과 존재감 자체를 더욱 또렷하게 드러내는 시도를 해 보고 싶습니다. 시간의 순환과 삶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작업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Q. 관람객이 작품 앞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길 바라시나요. A. 도자기가 시간과 기억을 담고 있는 존재로 인식되기는 바랍니다. 사람과 도자기 모두 흙에서 와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순환의 감각 속에서 각자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이 자신의 뿌리를 떠올리고 존재의 시간을 되새기는 조용하고 따뜻한 여정처럼 느껴지면 좋겠습니다.

Interview by ARTN Ed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