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큐와 선 앞에서

Jan 22, 2026

#3. 이큐와 선 앞에서

박서보, 시간의 기록

2014년 겨울, 파리 유학 시절 마주친 박서보 작가의 개인전은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다. 마레 지구의 갤러리 페로탕(Galerie Perrotin), 저택을 개조한 그곳에서 기억에 남은 것은 어떤 작품이라기보다 공간 전체에 깔려 있던 상태에 가까웠다. 색과 선이 그곳의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레 지구, 파리에서의 만남파리 갤러리 페로탕은 작품을 돋보이기 위해 뒤로 물러서 있는 장소는 아니다. 오래된 저택 그 자체로도 이미 밀도가 느껴지는 곳임에도 박서보 작가의 <묘법> 연작은 그 안에서 단정하면서도 고요한 울림을 주고 있었다. 선은 도드라지지 않고 색도 과하지 않았지만, 마치 공간이 화면의 리듬을 받아들인 듯 작품 앞에서 시선을 거두기란 쉽지 않았다.

<묘법> 연작의 선은 무언가를 말하려 하지 않는다. 반복해서 긋고, 다시 고르고, 같은 행위를 되돌리는 과정을 통해 감정을 뒤로 물린다. 그렇기에 그의 작업은 표현보다 훈련 혹은 수행이라는 말에 더 가까워지고, 선을 긋는 시간은 스스로를 붙잡아 두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무목적성으로 무한 반복하며, 나를 비우는 작업 그 후 여러 전시를 통해 다시 만난 작업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여전히 선이었다. 작품을 보고 있으면 이 생의 복잡함이 덜어내지는 듯하다. 후기 묘법에서 한지의 사용은 작가의 화법을 한 단계 더 느리게 만든다. 물감은 스며들고, 선은 눌린 흔적으로 남는다. 캔버스 위로 시간이 고스란히 축적되어 있기에 단순하지만 가볍지 않다.

올겨울 MMCA 서울 상설전에서 만난 작품도 쉽게 흩어지지 않았다. 김환기, 김창열 등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이 총망라된 전시임에도 오랜 시간 유지된 태도가 화면을 가득 채운 듯 박서보 작가의 작품은 단연 눈에 띄었다. 지금 바로 원작을 마주하고 싶다면, 이 전시를 찾는 것만으로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르게 변화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이런 흐름 위에서 다시 보게 되는 것이 작가의 판화 작업이다. 에디션이라는 형식 안에서 크기와 매체는 달라졌지만, 선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쉽게 느슨해지지 않는다. 박서보 작품을 소유한다는 선택에 있어 판화 에디션은 일상 속으로 들이기에 현실적이기도 하다.

박서보 재단이 연희동에 미술관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읽힌다. 단색화를 세상에 각인시키고 반복해 온 예술혼은 이제 한 사람의 작업을 넘어 장소로 남게 된다. 박서보의 선이 지금도 현재형으로 읽히는 이유가 바로 그 지속성 때문일 것이다.

글 이혜민 큐레이터18년간 미술관과 전시 현장에서 활동해 왔다. 한국일보 문화사업단, 일민미술관, 서울경제 백상미술정책연구소를 거치며 작품 앞의 순간을 기록했다.

  • Info
    • MMCA 서울 상설전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
    • 2025년 5월 1일 ~ 2026년 5월 3일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www.mmc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