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큐와 점 앞에서
Dec 24, 2025
김환기, 다시 생각하는 이유
김환기(1913-1974)의 작품은 마주한 순간뿐 아니라 그 이후까지 잔상이 오래 남는다. 미술관에서 마주한 거대한 화면을 지나 전시장을 나선 뒤에도 장면은 꽤나 또렷하다. 하루를 정리하는 밤, 조명이 낮아진 방 안에서 문득 떠오르는 푸른 점들. 그의 그림은 그렇게 일상 속에 조용히 스민다.
그의 예술을 따라가다 보면 한 사람의 이동 경로가 보인다. 서울에서 출발해 파리, 다시 서울을 거쳐 뉴욕으로 향하는 이 여정은 단순한 해외 체류의 기록이 아니라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에 대한 긴 선택의 연속이었다. 풍경과 사물이 남아 있는 초기를 지나 파리에서는 그 형식이 흔들렸고, 뉴욕에 이르러서는 화면의 형식이 다시 정리된 뒤 점화로 향하는 흐름이 분명해진다.
“늘 생각하라, 뭔지 모르는 것을 생각하라.”
뉴욕 시기의 김환기는 덜어내는 동시에 남겨두는 쪽에 가까워진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점화 연작에서 각각의 점은 또렷하게 그린 흔적이 아닌 캔버스에 스며든 흔적처럼 보인다. 묽게 풀린 물감은 천 속으로 번지며, 점과 점 사이에 미묘한 공기를 만들어낸다. 이 스밈과 번짐 덕분에 화면은 평면을 넘어 깊이를 갖게 되어, 마치 별이 떠 있는 무한한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시기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는 작가의 예술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김광섭(1905-1977) 시인의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에서 가져온 제목은 추상회화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정서적 울림을 남긴다. 같은 시기에 제작된 <19-VI-71 #206>과 같은 연작은 또 다른 방향을 보여준다. 서정적인 언어 대신 시간과 기록을 제목으로 삼은 화면들이다. 감정과 질서가 나란히 놓이면서 그의 추상은 한층 더 단단해진다.
“미술은 질서와 균형이다.”
후기 점화가 감정적이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화면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무작위는 아니다. 점들은 일정한 리듬 속에서 반복되고, 그 질서는 보는 이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 바라볼수록 잔잔한 물결을 마주한 듯 안정감을 준다. 매번 새로운 의미를 요구하기보다, 보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그래서 김환기의 그림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김환기의 예술을 지금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또 하나의 지점은 김향안과 환기미술관이다. 김향안은 단순한 배우자를 넘어 기록자이자 비평가이며, 김환기의 작업 환경과 사유의 구조를 함께 만든 예술적 동반자였다. 그리고 환기미술관을 통해 작가의 예술과 대중의 접점을 수없이 만들어낸 동시에 김환기의 시간을 다시 차분히 읽게 하는 장소로 만들었다.
“서러운 생각으로 그리지만, 결과는 아름다운 명랑한 그림이 되기를 바란다.”
이 문장은 김환기의 후기 작업을 가장 정확히 설명한다. 점 하나하나에는 고독과 그리움이 스며 있지만, 화면 전체는 이상하리만큼 맑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무겁지 않고, 오래 함께할수록 마음을 정돈해준다. 하루의 시작 혹은 그 끝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에 더 잘 어울리는 이유다. 그렇기에 미술관에서 직접 보아야 하는 작품이면서도, 나만의 공간 한켠에 들이고 싶기도 하다.
김환기의 점 앞에서 다시 묻게 된다. 우리는 어떤 시간을 쌓고 있는가. 그리고 그 시간은 결국 어떤 화면으로 남게 될 것인가.
글 이혜민 큐레이터18년간 미술관과 전시 현장에서 활동해 왔다. 한국일보 문화사업단, 일민미술관, 서울경제 백상미술정책연구소를 거치며 작품 앞의 순간을 기록했다.
- Info
- <Whanki_심상의 풍경: 늘 생각하라, 뭔지 모르는 것을…>
- 2025년 8월 22일 ~ 2026년2월1일 (기간연장)
- 환기미술관 whankimuseu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