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그림으로 남은 정원, 심봉민
Jun 12, 2026
화면에는 소년이 있고, 강아지가 있으며, 종이비행기와 종이배가 떠 있다. 언뜻 동화적인 장면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지나간 시간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기억, 그리고 그것을 오래 바라보는 마음이 겹쳐 있다. 심봉민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그리움의 정원’이라 부른다. 이 정원은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라기보다,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기억들이 조용히 머무는 자리다.
작품 속 소년은 작가가 ‘정원사’라고 부르는 존재다. 그는 과거의 자신이기도하고, 지금의 자신 안에 남아 있는 또 다른 자아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 어떤 기억은 사라지고, 어떤 기억은 이유 없이 오래 남는가. 작가는 그 알 수 없는 기억의 질서를 돌보는 존재로 소년을 화면 안에 불러낸다. 강아지와 종이배, 비행기 같은 작고 평범한 대상들 역시 지나간 시간을 불러오는 작은 단서가 된다.


Q. 미술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A.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공부나 운동을 할 때는 어딘가에서 경쟁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저는 그런 상황이 그리 편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그림은 경쟁에서 벗어나 혼자 머물 수 있는 시간이었고, 저에게는 하나의 피난처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일 자체가 즐거운 유희였고, 꾸준히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작가가 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Q. 동양화를 전공하셨지만, 현재는 서양화 재료와 방식으로 작업하고 계십니다. 변화의 계기가 있었나요? A. 동양화를 전공하게 된 것은 입시 과정에서의 우연에 가까웠습니다. 막상 동양화 재료를 다뤄보니 제 성격과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여러 번 겹쳐 칠하고, 오래 기다려야 하는 과정이 필요했죠. 그러다 회화과 수업을 들으며 아크릴을 접하게 되었고, 그 재료가 제 손에 잘 맞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크릴은 빨리 마르고, 덧칠과 수정도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성격이 급한 저에게는 훨씬 자연스럽게 다가온 재료였습니다.
Q.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소년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A. 작품 속 소년은 제가 ‘정원사’라고 부르는 존재입니다. 과거의 저이기도 하고, 또 다른 저 자신이기도 합니다. 저는 기억에 관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어떤 기억은 분명한 이유와 함께 남아 있지만, 어떤 장면은 왜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붙잡으려 하지 않았는데도 오래 남아 있는 기억들이 있죠. 그런 기억을 누군가가 관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제 마음의 정원을 돌보는 존재, 그 단서를 쥐고 있는 존재가 바로 작품 속 소년입니다.


Q. 작품 속 강아지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나요? A. 강아지는 다롱이라는 이름의 시골 강아지입니다. 누구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존재였어요. 하지만 저는 그 강아지를 무척 아꼈습니다. 제게는 처음으로 깊은 애정을 주었던 대상이기도 합니다.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는 존재에게 마음을 주는 감각이 제 작업의 시작과도 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Q. 비행기와 종이배도 자주 등장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A. 비행기와 종이배는 과거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오브제입니다. 하늘을 보면 어릴 때 종이비행기를 날리던 순간이 생각나고, 종이배를 보면 강가나 호숫가에 배를 띄우며 어디까지 흘러갈지 바라보던 시간이 떠오릅니다. 그 안에는 당시의 소망과 기대, 바람과 냄새 같은 감각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Q. 작업의 주제를 ‘그리움의 정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작가님이 생각하는 그리움은 무엇인가요? A. 저는 그리움은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사랑에 가깝습니다.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리움으로 남는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어떤 기억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는 슬픔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슬픔의 근원 역시 결국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제게 그리움은 사랑한 흔적이고, 다시 갈 수 없기에 더 깊어지는 마음입니다.
Q. 이전 작업에는 모노톤이나 회색 도시의 이미지가 많았다면, 최근에는 한층 밝고 화사한 색감이 두드러집니다. 변화의 이유가 궁금합니다. A. 한때는 기억의 색이 흑백에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꿈이 흑백으로 기록된다는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었고, 그렇다면 사람의 기억도 흑백 이미지처럼 저장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죠. 그래서 지금의 정원 시리즈도 처음에는 흑백 작업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작업을 이어가다 보니 표현의 영역이 조금 좁아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림이 가진 훌륭한 점은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을 전환하면서 컬러를 사용하게 되었고, 색을 통해 더 많은 이야기와 장면을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Q. 목탄을 부수고 갈아 물감과 함께 사용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 방식에는 어떤 이유가 있나요? A. 그림을 그리면서 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그림을 그리며 스트레스를 받으려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즐겁게 그림을 그렸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 운동장이나 모래 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 거칠고 자유로운 감각을 캔버스 위에서도 느끼고 싶었습니다. 목탄을 갈아 표면을 거칠게 만들고, 긁어내고, 물감이 마르기 전에 작업하면서 그때의 감각을 다시 불러옵니다. 그런 행위는 저에게 더 큰 창작의 에너지를 주기도 합니다.


Q. 작가님이 생각하는 미술, 혹은 예술이란 무엇인가요? A. 미술은 지나간 것을 지금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시간과 기억을 지금의 자리에서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죠. 우리는 지나간 것들을 더듬어보며 사유하고, 그 사유를 통해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은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Q. 관객들이 작품을 어떻게 바라봐 주길 바라시나요? A. 제 작업은 대부분 일상에서 출발합니다. 제가 그리는 것들은 하찮고 평범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가장 쉽게 잊히는 것들이 우리 삶을 이루는 중요한 조각일 수 있습니다.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놓치고 지나가는 것들이 많습니다. 제 작품을 보며 그런 것들을 다시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평범한 나의 삶도 소중하고, 특별해질 수 있다는 것을 느끼셨으면 합니다. 그것이 일상을 살아가는 데 작은 힘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심봉민 작가의 작업은 잊힌 것을 크게 외치는 대신, 작고 평범한 장면 앞에 오래 머문다. 그의 그림 속 정원은 과거를 붙잡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사랑했기에 남은 것들을 다시 바라보는 자리다. 그곳에서 평범한 하루의 조각들은 조용히 예술이 된다.
Interview by ARTN Edition